보스톤 마라톤 참가기6 - 힘들었던 귀환, 남은 이야기 기본 카테고리

새벽에는 달리는 생각만 했지 어떻게 숙소로 돌아오겠다는 계획까지 하지는 않았구요, 다만 지도를 보니 대회장에서 숙소까지 3킬로미터가 조금 넘는데 길 찾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아 회복주 삼아 살살 걸어오면 되겠다, 정 힘들면 우버타고 오면 되지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통비로 챙겨간 얼마간의 현금은 출발지에 두고 왔고 빈털털이 상태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피곤한 몸에 출발지를 통제하느라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어 어느 방향이 숙소 방향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구요, 휴대전화는 가져왔는데 와이파이를 가능하게 하는 소위 도시락은 숙소에 두고 와서 휴대전화의 구글맵이 작동하지 않는 겁니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오고 얼마간 헤매고 있는데 발과 다리는 아프고, 보스턴에서 이렇게 얼어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경찰에게 숙소 구역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그 경찰은 거기까지 멀다, 걸어서 못 간다, 택시 불러주랴 하는 겁니다. 나는 택시비도 없다, 멀어봐야 한 2마일 되지 않냐하니 그렇다고 하네요. 2마일은 껌이다, 나는 마라토너다라며 끝까지 자존심을 세웠구요 그 경찰은 그러냐, 너 잘났다 하는 표정으로 그래도 친절하게 가는 방향을 알려주었습니다. 방향을 잡고 가다가 만난 스타벅스에서 와이파이 연결해서 가는 길을 다시 확인해서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구요 그렇게 3쩜 몇 킬로미터를 그 복장으로 걸어 숙소로 안전하게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8시에 출발해서 달렸으니 늦어도 11 30분 전에는 도착했을 텐데 3시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던 모양입니다. 집에 오니 3시반쯤 되었더군요. 물에 수백번은 빠진 생쥐꼴로 숙소에 돌아와보니 많은 완주자들이 벌써 로비와 식당에서 자축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집사람이 끓여준 라면 한그릇을 먹고 나니 역시 데려오길 잘 했다는 생각에 만족감이 들었습니다.

묵었던 숙소에서는 완주자들에게 보스턴 라거 맥주인 샤뮤엘 아담스 한 잔을 로고가 박힌 글래스에 담아 그 글래스까지 주었는데요, 주최측이 제공한 다른 어떤 기념품보다 좋았습니다. 한국까지 깨지지 않도록 꽁꽁 싸매가지고 들어왔답니다.


새뮤엘 아담스 잔과 메달

생각나는대로 우선 적다보니 조금 정돈이 필요하겠지만 되돌아보는 보스턴 마라톤은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날씨만 조금 받쳐주었다면 홉킨턴의 운동선수 마을의 분위기나 전세계에서 온 많은 주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 많은 것을 느꼈을 텐데, 그렇게 추위에 떨지 않고 완주 후의 기쁨을 더 느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레이스 전, 레이스 후 제공하는 파티도 즐길 거리 중의 하나이구요, 특히 레이스 후에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에서 대대적인 축하 파티를 여는데 피곤에 지쳐서 집사람 표까지 사놓고 참여하지 못한 것도 억울한 부분입니다.

말하자면 작년에 비해 똑같은 비용 대비 혜택은 덜 받은 손해본 느낌은 있습니다. 그래도 위안을 삼자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꾸준히 달리면서 연출했던 달리기 장면과 구석구석 아기자기했던 마라톤 코스, 코스 내내 펼쳐졌던 열화와 같은 응원 인파들은 역시 보스턴 마라톤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국제 경기 공식 기록으로 받은 3시간 9 49초도 제게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나름 혹시 분위기를 타고 써브쓰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되는 욕심에 동마 이후에 어느 정도 훈련량을 유지하고 식이조절도 했습니다만, 공항 라운지와 뉴욕 메츠 구장에서 견디지 못한 맥주의 유혹과 당일 폭풍우급의 날씨는 그런 욕심을 많이 가볍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 한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이제 웬만한 날씨에서 뛰는 것은 별로 꺼릴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지금껏 뛰어본 중 가장 가혹한 날씨였고 그것도 보스턴이어서 포기하지 않고 나름 즐기며 달렸습니다. 다만 뛰고 난 후의 대비라든지 하는 것은 더욱 철저히 해야할 것 같습니다.

글을 정리하려고 하다보니 24일 화요일 아침 6시네요. 바깥에 약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보스턴 마라톤에서 기념으로 얻은 마라톤 티 입고 호수공원을 뛰러 나가려고 합니다. 매서웠던 보스턴의 날씨와는 달리 오창 호수공원에는 봄꽃이 활짝 피어있을 겁니다.

<끝>